Field trip Diary

5년 만의 일본 여행은 결국 역사 여행으로 – 일본 사가현 소도시 역사탐방 (5) 다케오시립도서관

oneum_rong_rei 2024. 4. 22. 13:57

사가성 혼마루 역사관을 향하던 즈음부터 이미 만삼천 보를 넘겼건만 가보고 싶은 곳이 한 곳 더 남았다. 목적지는 사가역에서 열차로 20분 정도 걸리는 타케오온센역. 워낙에 휴양 여행은 하지도 못할뿐더러 온천을 좋아하지도 않아서 일본을 가더라도 유명한 온천 여행지들은 늘 일정에서 제외하는데, 이번에는 온천마을을 일정에 넣었다. 물론 목표는 온천이 아니지만.

 

어제 가라쓰에서 돌아오는 길에 원래 세웠던 일정을 전부 뒤집어엎으면서 찾았던 장소인 다케오시립도서관. 찾다보니 도서관 연간 방문객 수가 다케오시 인구보다 많다길래 흥미가 돋았다. 얼핏 사진으로만 보기에도 내부 인테리어가 예뻤고, 코엑스 별마당 도서관의 레퍼런스가 되었다고 하니 더 궁금하잖아.

 

오늘이 마지막 사용기한인 북큐슈레일패스를 충분히 활용하고 싶어서, 20분 밖에 안되는 거리지만 왕복으로 지정석 예매까지 하고 오늘의 마지막 일정을 시간 계획에 맞춰 착착 다녀오겠다며 각오를 다졌다.

예매부스의 직원이 "돌아오는 것도 지금 예매할거야? 저쪽 역에서도 할 수 있어."라고 물었지만 단호하게 돌아오는 것까지 지정석 예매. 시간에 맞춰 돌아오고 말겠다!

 

내내 완행열차에 각 역 정차만 타고 다니다가 급행 타니까 창밖 풍경이 유난히 더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던 찰나 타케오온센역에 도착했다. 구글맵을 검색하니 도서관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 걸린단다. 40분도 걸었는데, 20분쯤이야. 역에서 나와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길에 사람이 너무 없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평일 오후라도 그렇지, 여긴 다들 차만 타고 다니나- 간간히 자동차는 지나다니는데 길에 사람이 없으니까 진짜 세트장같네. 이게 어떤 느낌이었냐면 멀고 먼 옛날 봤던 후레쉬맨 같은 전대물에 나오는 로봇 전투씬의 로봇이 내가 된 느낌이랄까. 분명히 건물들이 다 나보다 큰데도 이 씬에서 내가 제일 큰 그런 느낌. 타케오시청을 지나는데도 바람만 불고 사람이 거의 안 보이고, 심지어 길가 상점도 영업을 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모르겠어서 이 동네 사람들은 다 온천에 가 계신가 싶었다.

이렇게 길에 아무도 없어도 되는건가~ 싶었지만 지도만 믿고 앞으로 파워워킹
외관은 그렇게까지 특별하게 생기진 않은 타케오시도서관

 

하도 길 가는 사람이 없어서 이게 맞는건가 의구심이 들 때쯤 드디어 타케오시립도서관 표지판이 보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일반적인 공공도서관 건물 같아서 오히려 내부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다.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오와~ 눈에 보이는 공간 가득 책들이 빼곡하지만 질서정연하게 앉아 있었다. 요즘 종이책 자체를 접하는 빈도가 줄어서 그런가 뭔가 반가웠다. 애초에 책벌레 정도로 책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오랜 친구를 가득 만난 것 같은 반가움이랄까. 이러니까 뭔가 책에 엄청난 애착이 있는 것 같지만 그냥 이 공간이 그런 느낌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러면서 스타벅스와 서점까지 같이 있어서 커피 마시면서 책을 빌려 보거나 사서 보거나 할 수 있어서 어느 정도의 자유로움도 있었다. 내 기억 속 도서관은 책을 보는 곳보다는 시험공부 하러 가는 곳이라서 이미지 자체가 다소 폐쇄적인 느낌인데 여기는 카페 영역이 있어서 그렇게 폐쇄적인 느낌은 덜한 것 같았달까.

도서관 이용객을 방해하지 않도록 사진은 스타벅스와 서점 영역에서만 촬영 가능하단다.

 

거기다 들어가자마자 시선을 확 끌어당기는 고양이책 매대. 12년 고양이 집사 경력이 내게 부여한 능력이라 함은 어디든 고양이 레이더가 가동된다는 점인데 고양이 그림이 가득한 책들이 모여있다니, 나의 집사 세포를 끌어당기는 자석 그 자체다.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책이 있었는데 근현대 화가들이 그린 고양이 그림을 모아놓은 에세이집 ‘명화 속 고양이’였다. ‘어머, 이건 사야 해!’라고 보는 순간 생각했지만 어차피 서양 작가의 책을 번역한 것이니 우리나라에도 번역서가 분명 있을거다 싶어 내려놨다. 여기서 사 올걸이라고 나중에 후회했지만.

제목, 표지에 고양이가 가득했던 고양이책 매대. 정신 바짝 차리고 있지 않았으면 한 권씩 다 집어왔을지도 ㅎㅎ

 

옛날에 일본에 잠시 살았을 때에도 그랬고, 일본 여행을 할 때도 그랬지만 일본은 책이나 잡지를 비롯한 콘텐츠의 소재가 정말 다양하다고 생각했다. 잡지도 정말 많고, 여행 가이드북도 소재가 정말 다양하고. 그런데 거의 모든 방면에서 유행의 파도가 강력한 한국 사람인 내 눈에는 이게 다 수요가 있는 걸까 싶기도. 이게 궁금하기만 한 나는 비즈니스 감각은 없는게 분명하다.

 

도서 매대들과 나열된 책들을 한바퀴 쭉 둘러본 뒤에 스타벅스 자리에 앉았다. 이런 전세계적인 체인이 좋은 점은 나의 까다로운 주문을 소화할 수 있다는 것을 내가 명확히 안다는 것. 나는 카페인도 잘 안 받고, 경미한 유당불내증도 있는데다 무당 내지는 극저당을 선호하기 때문에 마실 수 있는 커피가 한정적인데 스타벅스는 그런 점에서 안심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다음에 일본에 오게 되면 제대로 된 찻집을 가보고 싶긴 한데- 다도 체험 아니고 전통찻집이 있을까 모르겠다.

주문하려고 줄을 서 있으니 앞에서 한국 중년 부부가 동전을 탈탈 털고 계셨다. 단체관광의 마지막 코스가 여기인가 보다. 저 마음 알지, 나도 아직 지갑에 14엔이 남아있다고. 너무 털고 싶지만 못 털어도 스트레스 받지 않기로 스스로 다짐하며 저분들의 동전 털기 작전의 성공을 빌었지만 아무래도 실패하신 듯.

영수증이 일본어일 뿐, 늘 마시던 걸 스타벅스에서 마시고 있자니 여기가 일본인가 한국인가 ㅋㅋㅋ

 

왠지 나도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모른척 아이스디카페인소이라떼 한 잔과 녹차향이 솔솔 나는 우지녹차스콘 하나를 샀다. 그러고 보니 이게 제대로 사먹은 유일한 끼니인가봐. 나날이 간이 약해져서 한국 음식도 짜고 달고 자극적이어서 잘 못 먹는 입맛으로는 일본 음식은 너무 짜서 사 먹기가 힘들다. 편의점에서 산 계란말이에도 간장이 뿌려져 있었다고. 내가 아는 맛인 아이스디카페인소이라떼가 유일하게 안심할 수 있는 먹을거였달까. 우지녹차스콘은 녹차향이 너무 좋았지만 화이트초코가 올라가 있어서 너무 달았다. 역시 녹차가 들어간 먹을 거는 향으로 먹어야 해. 예전에 우지를 갔을 때 정말 공기 중에 녹차향이 가득해서 너무 좋았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주변에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는 현지인들 사이에서 야무지게 시간을 즐긴 뒤에 일어섰다. 선물용 그림책도 한 권 사 가지고 뿌듯한 마음으로 다시 도보 20분 타케오온센역으로. 도서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타케오신사와 몇 백년 된 녹나무가 있다고 했지만 나는 이미 도서관만으로도 마음이 풍족해져서 더 욕심내지 않고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아직 해는 중천이지만 이미 2만보를 넘긴 시점이라 조금이라도 더 둘러봤다가는 진짜 앓아누울지도 모르니까. 5년 만에 여행 왔다고 너무 양껏 돌아다녔나 싶어서 스스로도 절레절레 머리를 저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흡족한 마음으로 숙소로 돌아왔다.

타케오시는 전형적인 일본의 작은 도시 풍경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여행의 마지막 밤. 많이 걷기도 했고 해서 욕조에 따신 물을 받아 반신욕을 하면서 몸을 풀었다. 중요한 14엔 털기에도 성공했고. 어렸을 때는 이정돈 걸어 다녔던 것 같은데 이제는 몸이 일정을 겨우겨우 따라간 느낌이다. 그래서 오늘 같은 날은 많이 쉬어줘야 한다. 여행 갔다 와서 하루 이틀은 휴일이 필요한 타입. 그래도 가보고 싶은 곳은 다 가 봐야 직성이 풀리니 발바닥이 찢어질 것 같아도 어쩔 수 없는 일. 다시 한번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여행 스타일을 확신하며 여행의 마지막 밤을 마무리하고 다음날 아침 비행기로 집으로 돌아왔다.

 

2박 3일 같은 3박 4일의 여행은 온통 내 마음대로가 가득찬 여행이었다. 어떤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내 마음대로 가보고 싶은 곳으로만 구성한 일정에 먹고 싶으면 먹고 안 먹고 싶으면 안 먹고. 매일 예상치 못하게 고양이들을 잔뜩 만났고, 집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우리 고양님 끊임없이 그리워하며 분리불안을 느끼기도 하고. 또 다음 여행을 꿈꾸며.

여러 측면에서 이번 일본 여행은 아주 성공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