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Diary

[빛의 거장 카라바조 & 바로크의 얼굴들] -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oneum_rong_rei 2024. 12. 19. 18:56

몇 주 전쯤, 평화방송 인스타 피드에서 카라바조 전시와 관련된 콘텐츠를 발견했다. ‘카라바조바로크라는 단어가 나를 유혹했다. 게다가 가톨릭 주보를 가져가면 입장권 할인까지 해 준다는데, 이건 가야 한다!

 

역시나 혼잡함을 걱정해 평일 이른 오후로 일부러 시간을 잡아서 야무지게 주보까지 챙겨가지고 예술의전당으로 향했다. 같은 한가람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반고흐 전에 연일 엄청난 인파가 몰린다는 정보를 미리 검색해서 알고 있던 터라 카라바조 전도 그러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지하 1층에서 꽉 차게 출발한 엘리베이터는 반고흐 전이 진행 중인 1층을 지나자 나를 포함해 딸랑 2명 남았다.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왠지 카라바조 자존심에 금 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달까. 하하-

 

빛의 거장 카라바조 & 바로크의 얼굴들

2024-11-09(토) ~ 2025-03-27(목) <br /> 한가람미술관 제3전시실, 제4전시실<br />주식회사 액츠매니지먼트

www.sac.or.kr

- 일시 :  2024-11-09(토) ~ 2025-03-27(목)

- 장소 :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2층) 제3전시실, 제4전시실

- 내부 사진촬영 가능. 단, 휴대폰으로만 촬영 가능

아마 카라바조 전시도 주말에는 인파가 꽤 되는 것 같았다. 매표소와 입구에는 각각 예매 후에 입장대기번호를 발송해 주면 그때 와서 줄서라는 안내가 되어 있었다. 역시 평일 오후가 좋은 선택이었어.

 

오랜 신자 생활 중에도 주보 할인의 혜택은 처음 이용해 보는지라 좀 수줍게 매표소에 주보를 보여줬더니 바로 할인을 적용해 주었다. 요즘 다양하고도 유명한 작품들을 전시하는 경우가 많아져서, 그리고 비싼 기자재를 사용해야 하는 미디어 아트 전시가 많아져서, 체험형 인터렉티브 전시도 늘어나서 등등의 다양한 이유로 전시 입장료가 대체로 비싸진 느낌이다. 사실 할인 혜택이 없더라도 보고 싶은 전시는 보겠지만 이왕이면 혜택을 받을 수 있으면 좋긴 하지. 미리 예매하는게 익숙한데 주보 할인은 현장 매표를 해야해서 그 부분이 조금 낯설긴 했지만.

 

어쨌든 긴 기다림을 각오한게 무색하게 매표를 할 때도 입장을 할 때도 줄 하나도 안 서고 스무스하게 전시 관람에 돌입했다.

 

카라바조는 어찌되었든 나한테는 참 신기한 인물인게, 나는 그래도 그림에 화가 개인의 성정이 묻어나온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그림에 비해서 그의 일생이나 성정이 더 폭력적이고 폭발적이라서 붓을 잡고 어떻게 저 승질머리를 눌러서 그림을 그렸을까나 싶다. 그의 그림은 직설적이면서도 드라마틱하긴 하지만 묘하게 화가 느껴지지는 않고 묘하게 냉정한 느낌이랄까. 불 같은 평소 성정에 비해 그림은 얼음같이 차갑다고 해야 할까.

카라바조의 그림에서 묘하게 차가운 냉정함을 느낄 때가 있다.

 

전시는 몇 개의 섹션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카라바조의 유명한 작품 몇 점과 그에게 영향을 준 선배들의 그림, 그리고 카라바조와 동시대의 화가들 작품,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후배 화가들의 그림이 모두 담겨 있었다. 생각보다 카라바조 작품의 비중이 엄청 높은 건 아니라서 카라바조만 기대하면 좀 실망스러운 포인트일 수 있겠으나 나는 오히려 카라바조가 가진 천재성에 가려진 당대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미리 전체적인 느낌을 종합하자면, 나는 그림을 보는 내내 성경 공부를 하는 기분이었다. 카라바조가 이탈리아 사람이니까 가톨릭 문화 토양에서 자라서 살았고 생을 마감했으므로 그냥 개인적으로 그린 것이든 의뢰를 받아 그린 것이든 그림의 소재가 종교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가톨릭 신자인 나는 또 이 그림이 성경 속 어떤 장면일지, 누구일지 혼자 퀴즈 풀 듯이 맞춰보는 게 의외의 재미였다. 교회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나 아니면 성당에서 성경 공부 하시는 신자분들이 보시면 이해하기가 너무 좋으시겠다 싶었다. 그리고 또 교회사를 공부하면 한 번 이상씩 보게 되는 성화들 중에서 카라바조의 그림들이 꽤 많은데 그런 그림 중에서 몇 점은 실물로 본다는 내적 반가움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가톨릭에 국한되지 않은 소재의 그림들도 있다.

어쨌든 첫 번째 섹션은 카라바조에게 영향을 준 선배들, 초창기 밀라노 시절의 공방 스승님과 동료들의 작품이 자리하고 있었다. 카라바조의 본명은 미켈란젤로 메리치인데 그 유명한 미켈란젤로랑 이름이 같아서 그가 살았던 동네 지명인 카라바조라고 불렸다고. 일단 앞선 미켈란젤로는 후대의 예술가들에겐 너무나도 넘사벽이었을테니 그 이름을 쉽게 쓸 수 없었을 것이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렇게 같은 이름을 쓰게 된 것은 아마도 세례 때 성인의 이름을 지어 쓰는 세례명 문화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재빨리 인터넷 검색 찬스를 사용해 본 결과, 가톨릭 문화권에서는 이미 3세기부터 성인의 이름을 따서 아이의 이름을 짓는 것을 권장하고 있었다는 문헌 증거도 있고, 5세기부터는 자리잡았다고 볼 수 있단다. 미카엘 대천사는 지금도 인기 있는 세례명 중 하나니까 저 때는 더더욱 겹칠 수 있었겠어.

다시 전시 작품으로 돌아오면 카라바조에게 영향을 준 선배들의 그림은 뭐랄까 중세의 향기가 남은 정적인 느낌도 있으면서 묘하게 입체적이라 좀 신기한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그림이 약간 부조 같은데 올록볼록하게 튀어나와 있는 부조라고 해야 하나? 잘 표현하긴 어려운데 나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이걸 보다 드라마틱하게 발전시킨 것이 카라바조였구나를 느낄 수 있었다.

 

카라바조의 사조는 자연주의라고 불린다는데 워낙에도 실제같이 잘 그리기도 했지만 강렬한 빛의 대비를 이용한 극적인 효과(이걸 기법으로 말하면 키아로스쿠로’, 이 효과를 주로 활용했던 화파로 말하면 테네브리즘이라고 한다고. 어렵구만;;)로 보는 사람의 시선을 확 잡아끄는 그의 그림은 당대와 후배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카라바조와 친하게 지냈던 화가들 중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바로 젠틸레스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라는 작품이 워낙에 강렬했고 또 여성이라고 해서 인상에 남았던 그 화가의 이름도 젠틸레스키였던 것 같은데. 작품 설명에 쓰여 있는 이름은 여자 이름은 아닌 것 같아서 찾아보니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아버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라고. 어쩐지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가 사실적이면서도 강렬하더라니 아빠 친한 친구가 카라바조였구나.

카라바조의 절친이었다던 오라치오 로미 젠틸레스키의 <회개하는 막달라 마리아>

 

또 처음 접했지만 카라바조가 자기 보다 정물화를 잘 그린다고 했다던 여류 화가의 정물화도 나와 있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성들의 사회 활동이 쉽지 않았던 17세기에 그래도 재능이 있는 여성들이 있었고 또 그 재능을 무시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어서 몇 명이라도 이렇게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있구나. 나도 뭐라도 이름을 남겨야 할텐데 나는 후에 어떤 이름으로 남으려나 싶다가 이 나이에 이미 글렀나 싶기도 해서 슬쩍 웃으며 다음 섹션으로 걸음을 옮겼다.

요즘 약간 물량공세의 전시들을 봐서 그런가 사이즈 큰 그림들이 한 벽에 하나씩 시원시원하게 걸려있는 것을 보니 관람 자체에도 좀 여유가 생기고 관람객이 적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전체적인 분위기가 차분하고 한가로워서 좋았다. 대신 유리 씌우지 않은 유화 작품들이 그래도 걸려 있으니 작품 바로 앞에서 말 많이 하는 것은 금물. 공간은 충분히 있으니 일행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면 조금 뒤로 물러서서 하면 좋겠다.

전시 타이틀은 카라바조이지만 17세기 이탈리아 바로크 회화의 흐름을 보여주고 또 카라바조에만 맞춰져 있는 스포트라이트를 다른 화가들에게도 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읽히는 전시였다. 언젠가 카라바조는 악마의 재능을 타고나서 복잡한 구성의 그림을 그릴 때도 밑그림 없이 바로 그냥 쓱쓱 그림을 그렸다고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어떤 그림에서는 손이 좀 잘못 그려져 있기도 하다고 하는데, 어쨌든 눈에 띄는 대단한 재능임은 틀림이 없다.

모든 관람객들이 감탄해 마지 않았던 투명한 화병의 물 표현 좀 보라지!!

 

그렇지만 바로크라고 이름 붙은 한 시대를 한 사람의 재능만으로 열어젖힐 수는 없었을테다. 카라바조의 회화적 영향력이 강하게 남은 시대이긴 하지만, 한 시대를 만들었던 수많은 예술가들의 힘도 느끼고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의미있는 전시관람이었다.

익명의 촛불화 거장(?)의 작품이라는 <기도하는 성 예로니모>
카라바조의 사조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화풍으로 십자가 너머를 올려다보는 눈빛이 너무 인상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