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Diary

[미셸 들라크루아 : 영원히, 화가] -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 문화홀

oneum_rong_rei 2025. 6. 8. 14:32

들라크루아. 서양사와 서양미술사에서 그 이름은 단 한 장의 그림으로 각인되어 있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라는 그림으로.
프랑스혁명을 상징하는 그림으로도, 그리고 들라크루아라는 이름을 상징하는 그림으로도 딱 떠오르는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외젠 들라크루아다. 그런데 외젠이라는 이름말고 그냥 들라크루아라는 성만 뇌리에 강렬하게 박혀있는 바람에 얼리버드 특가 광고가 떴을 때 반사적으로 예매한 전시가 있었다.
그게 미셸 들라크루아라는 화가의 전시였는데, 얼리버드라 저렴하기도 했고 전시 장소가 가깝기도 했고 해서 그냥 보러 가기로 했다.
 

미셸 들라크루아: 영원히, 화가 – France en Corée – Culture

2025년 5월 24일 (토)부터 8월 31일 (일)까지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 문화홀에서 〈미셸 들라크루아: 영원히, 화가〉 전이 열립니다. 미셸 들라크루아(Michel Delacroix)는 1933년 파리 태생의 화가로, 1930~

kr.ambafrance-culture.org

- 기간 : 2025년 5월 24일~8월 31일
- 장소 : 서울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 문화홀
- 사진 촬영 일부 가능(프롤로그, 1악장 구역, 에필로그 구역만 촬영 가능 / 2,3,4악장 구역 촬영 불가)
 
그렇게 한참 전에 예매를 해 두고 이런저런 일로 정신없이 지내다가 이번 대선 휴일에 시간이 나서 다녀왔다.
나갈 준비를 하면서 문득 화가에 대해서 진짜 너무 아무것도 모르고 전시를 가는구나 싶어서 급하게 챗gpt한테 검색을 시켰다. 그랬더니 90세가 넘은 현재도 그림을 그리는 화가시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어릴적부터 그림을 공부하였고, 37세부터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약 50세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본인 작품을 그리기 시작한 인물이라는 것이 검색 결과를 간단히 요약한 결과였다.
 
지피티 녀석이 그의 그림 스타일을 '나이브 양식'이라고 하면서 나와 잠시 설전을 벌였는데, 나이브 양식이 뭐냐고 물어봤더니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않고 자기가 그리고 싶은 대로 그려서 다소 어린 아이가 그린 것 같은 정제되지 않은 그림 스타일을 나이브 스타일이라고 한다는 것이 아닌가. 응? 너가 미셸 들라크루아는 어린 시절부터 미술 교육 받았다고 했잖아? 근데 왜 그 사람 스타일이 나이브야? 그랬더니 그제야 나이브도 두 가지 갈래가 있단다;; 하나는 앙리 루소처럼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않고 본인만의 개성 있는 화풍을 완성한 경우고, 또 하나가 정규 미술 교육을 받았지만 자신의 선택으로 그런 학습된 화풍을 따르지 않고 정제되지 않은 개성을 드러내는 경우란다. 흥- 그럴거면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어야지- 
 
그리고 또 하나. 나를 이 전시 예매로 이끈 들라크루아는 프랑스에서 희귀한 성이 아니라서 외젠 들라크루아와 미셸 들라크루아는 혈연적 관계가 아예 없단다. 나는 그래도 외젠 들라크루아랑 친척 집안이라도 되려나 했는데 ㅋㅋ

여하튼 급하게 기초 배경지식을 주워넣고 전시를 보러 갔다.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화가와 전시 취지를 간략하게 설명한 패널을 정독했다. 보통은 그림을 보는데 시간을 더 많이 할애하지 텍스트를 열심히 읽지는 않는데, 워낙 화가에 대한 배경지식이 적다보니 정보가 더 필요했다. 텍스트는 화가에 대한 정보도 있었지만 전시 기획자가 화가에게 느끼는 존경과 경이의 감정이 더 크게 다가왔다. 90세가 넘은 현재까지도 활발히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한 경이와 그가 영원히 화가로 기억되길 바라는 마음이 도입부부터 느껴지다니.
 
그리고 본격적인 작품 감상에 돌입했다. 1악장 구역에 전시된 그림들은 대체로 1990년대 후반 작품으로 화가가 거의 대부분의 삶을 보냈다는 파리의 다양한 모습이 담겨 있었다. 노트르담 대성당, 에펠탑, 사크레쾨르 대성당 같은 파리의 랜드마크들이 그림 마다 있어서 유화버전의 파리로 여행을 하는 느낌이 들었다. 벌써 다녀온 지 15년도 훌쩍 넘은 첫 유럽 배낭 여행의 기억과 그 이후에도 몇 번 더 방문했던 파리 여행의 기억이 그림들 위로 계속 겹쳐졌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파리가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나보다. 기억 자체를 사진처럼 장면으로 저장하는 편인 나는 앞뒤 상황은 하나도 기억 안 나도 딱 소환되는 이미지가 있는데 이 그림들은 내 기억 속 파리 사진들을 계속 불러냈다. 그때의 즐거운 기억들이 계속 떠올라서 기분이 좋아졌다.

2악장~4악장 구역은 사진 촬영은 불가했는데, 보니까 2023년~2025년까지의 아주 최근 최신 작품들이라서 그런 것 같았다. 그런데 2023년에 그렸다는 파리 그림에 아주 어여쁘고 뽀오얀 노트르담 대성당이 있다. 2023년이면 노트르담 대성당 얘는 불 타서 없을 때 아닌가 싶어 급 검색을 해 보니 역시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는 2019년이었다. 뉴스에서 보고 너무 충격적이었는데;; 
여튼 그래서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니 길에 마차도 다니고 중절모 쓴 신사도 걸어다니고 2023년 현재의 모습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처음엔 화가의 어릴 적 파리를 그린걸까 했는데... 그렇다고 하기에도 중절모와 마차는 너무 옛날인 것 같고-
아까 지피티랑 설전을 벌이느라 잠시 밀어두었던 내용이 떠올랐다. 화가는 파리의 나치점령기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그래서 나는 조금 더 과감하게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 장면들은 아마도, 어쩌면, 화가가 어린 시절에 꿈꾸었던 파리의 모습이 아닐까 하고. 프랑스는 바로 이 직전에 벨 에포크라고 하는 번영의 시대를 살았다. 모든 것이 풍요롭고 풍성하고 아름다웠던 시절이 나치에 점령당한 시대가 되었으니 더 그립고 더 아름답게 느껴졌겠지.
그리고 또 한편으로 언젠가 무슨 방송에선가 알츠하이머였나 아니면 뇌에 큰 충격으로 손상을 입었던가 해서 어린 시절 자기가 살았던 마을을 생생하게 그릴 수 있게 된 사람 얘기를 본 적이 있어서 그것도 떠올랐다. 완전히 맞닿은 경우는 아니겠지만.
그 다음으로는 내 나이가 90이 되었을때, 나는 어느 시절을 돌아볼 것인가를 생각했다. 별로 과거를 그리워하는 타입이 아니기도 해서 어떠한 지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삶의 끝자락에서 돌아볼만한 과거가 없는 것도 엄청 섭섭할 거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떤 내 모습이 내 생각에 가장 예쁠까도 생각해보면 그것도 모르겠다. 그게 있어야 그거랑 제일 비슷한 모습의 나를 회상해볼텐데- 나는 뭘 하는 나를 제일 좋아할까 그것부터 잘 따져봐야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화가의 인터뷰 영상이었다.
화가는 영상에서, 그림을 80년 동안 그려왔지만 아직도 그림이 제일 재미있고 만일 다음 생이 있으면 그림을 더 잘 그리는 화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한평생 그림을 그려왔는데, 다음 생에도 화가가 하고 싶다니.
굉장히 깊고 순수한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직도 평생 뭘 해야 행복할까를 고민하고 있는 입장에서 저 지고지순한 마음이 가늠은 안되었지만 울림은 있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사전정보 없이 또는 아예 모르는 작가의 전시를 보러 가는 일은 거의 없는데 어떻게 하다보니 보러 오게 된 전시에서 너무 좋은 시간을 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도 내가 가본 적 있는 파리 배경이 대부분이고, 동심이 느껴지는 것 같은 천진한 그림체와 직관적인 주제라 어렵지도 않았고- 누구나 삶의 끝자락이라고 생각하는 나이에도 끊임없이 붓을 잡고 자신의 세계를 펼쳐내고 있는 한 인간의 힘도 느낄 수 있어서 즐거웠다.
 
그리고 종종 나에게 물어봐야겠다.
90살 쯤 되었을 때 돌아보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잘 보이는 사람으로 살고 있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