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파, 모네에서 미국으로 : 빛, 바다를 건너다] - 더 현대 서울 ALT 1
처음 서양미술사를 접했던 시절, 나의 첫 번째 고비는 인상주의 화파였다. 당대 새로운 화풍을 선보였던 이들의 그림을 “인상만 그렸다”고 비아냥거렸던 한 평론가의 멘트에 어느 정도 공감을 할 정도로 얕디 얕은 미술적 감각의 소유자인 나는 이전까지는 어떤 역사적 흐름이나 사회의 구조, 종교적 배경 등으로 화풍을 이해했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화가 개인의 주제나 감각이 드러나기 시작한다는 인상주의부터 이해의 진도가 더뎌져 급격히 흥미가 떨어졌었다.
그래도 미술사의 세계에서 유명한 화가들이 전부 포진하고 있는 인상주의는 어떻게 해서든 넘어야 할 산이었다. 이 유명 인상주의 화가 중에서 유난히 이름만 머릿속에 남아있고 그림은 영 이미지가 희미한 화가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끌로드 모네. 마네와 모네가 ‘네’자 라임이 맞아서 헷갈려서 심혈을 기울여 이름을 외웠던지라 이름은 또렷하고, 그의 대표작이 <수련>이라는 것도 활자로 외워서 알지만 반고흐처럼 이름과 대표작과 그림과 스타일이 딱 머릿속에 남아있지는 않은데 어쩌면 내가 그의 그림을 실제로 많이 보지는 못해서인가보다 하고 있던 차에 마침 그의 그림을 볼 수 있는 전시회가 열린다고 해서 다녀와 보았다.
네이버 예약 :: 인상파, 모네에서 미국으로: 빛, 바다를 건너다
인상파, 모네에서 미국으로: 빛, 바다를 건너다 예매페이지 입니다.
booking.naver.com
- 일시 : 2025.02.15~2025.05.26
- 장소 : 더현대서울 ALT1
- 사진 촬영 가능(플래시 금지), 동영상 촬영 불가
길치력이 상당한 나는 자주 가지 않는 전시관이면 100% 길을 헤매는지라 더현대서울이라는 장소는 고난을 각오해야 하는 곳이었지만- 마침 이전에 [비엔나 1900전]을 다녀왔다면 입장권 할인도 받을 수 있어서 뭔가 횡재한 것 같은 마음으로 룰루랄라 길을 나섰다.
길을 헤맸는가, 안 헤맸는가의 결과는 놀랍게도 안 헤매고 한 번에 티켓부스 앞에 도착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나 왜 안 헤맸지? 스스로 의아해하면서, 이걸 의아해하는 내가 웃기기도 하면서, 생각해 보니 아마 작년인가 폼페이전 보러 올 때 이미 헤맨 전적이 있어서였던 것 같다. 그때 여길 처음 왔었는데 쇼핑몰 건물 안에 예쁜 정원이 조성되어 있던 풍경이 꽤 인상적이었나보다. 역시 나는 이미지로 기억을 하는 스타일이라 이 정원형 그림을 기억하고 있었어.

티켓부스에서 티켓을 교환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는 않았지만 비어 있는 물품보관함을 찾는 것이 문제였다. 티켓부스 양쪽으로 보관함이 있는데 개수가 많지도 않고 티켓부스 안쪽까지도 보관함이 있어서 여기까지 들어가도 괜찮나 싶기도 했고, 무엇보다 티켓부스 줄 서신 다른 분들과 동선이 꼬이게 생겨서 눈치가 좀 보였다. 그래도 나의 도라에몽 거북이 등딱지를 물품보관함에 고이 모셔두고 닌자처럼 티켓부스 라인을 요리조리 빠져나오는 데 성공!

이제 본격적으로 전시관람에 돌입해보자.
전시 초반부는 몇 점의 인물화를 빼고는 거의 풍경화였다. 인물화 중에서는 귀스타브 쿠르베의 <고양이와 여인>이라는 작품이 눈에 확 들어왔다. 고양이 집사가 고양이 그림을 그냥 지나칠 수 있을 리가 없기도 하거니와 쿠르베=사실주의로 알고 있는데 여기에서 만나니 좀 신기했달까. 사실주의건 인상주의건 저 새하얀 고양이 너무 귀엽잖아. 이 그림의 주인공은 명실상부 ‘여인’인데 고양이만 흐뭇하게 바라보다니- 우리 시야는 저렇게 안으면 안되는데, 쟤는 저러고 잠도 자네? ㅎ 끝까지 고양이만 보고는 다음 작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건 어쩔 수 없다, 나의 정체성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고양이 집사니까. 고양이 기르는 화가, 고양이 그리는 화가 다 좋아-


전시 초반부의 풍경화들은 대체로 프랑스 화가들의 작품이었는데, 유화물감으로 그린 풍경화들은 붓의 터치와 물감의 두께감이 느껴져서 보는 맛이 있었다. 이건 아마 어릴 적 보았던 밥 아저씨의 영향이 큰 듯하다. 나이프와 붓으로 툭툭툭 물감을 두껍게 올리면 나무가 되고 구름이 되고 했던 걸 어린 마음에 되게 재밌게 봤던 기억이 아직까지도 있으니까.


예전에 튜브물감의 발명에 대한 콘텐츠를 제작하면서 덕분에 화가들이 아틀리에에서 벗어나 직접 풍경을 보면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는 얘기를 봤었다. 지금은 너무 당연하게 사용하는 튜브물감이 생각보다 미술사에 끼친 영향이 커서 ‘오! 대단한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튜브물감의 수혜를 받기 시작한 첫 세대가 바로 인상주의라고.
물감의 변천도 꽤 유서가 깊었는데, 색안료와 달걀흰자를 섞어서 쓰던 템페라 물감은 너무 빨리 말라서 아주 재빠르게 그림을 그렸어야 했고 물감을 보관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뿐더러 달걀도 비싸서 여러모로 마음껏 쓰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템페라 물감을 만들기 위해서 그래도 좀 여유 있는 화가들은 집에서 닭을 기르기도 했다는데, 이게 효율은 장담할 수 없었겠지. 이후에 안료에 식물성 기름을 섞는 유화물감이 발명되면서 물감을 두껍게 덧발라 두께감까지 나타내는 표현법도 가능해졌고 또 한번에 많이 만들어두는 것도 가능해졌지만 그래서 물감을 잘 보관할 수 있는 아틀리에나 스튜디오 같은 곳에서만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고 한다. 커다란 들통 같은 곳에 섞어놓은 물감들을 바리바리 이고지고 밖에 나와서 그림을 그리기에는 쉽지 않았을테니까 말이다. 그러다가 튜브물감이 등장한 것이다. 이제 화가들은 간단히 이젤과 팔레트, 튜브물감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렇게 밖으로 나오니 빛에 따라서 달라지는 풍경의 색감을 그리는 것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언젠가 노년의 취미로 유화를 그리는 어르신을 취재한 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하늘은 하늘색으로 칠하는 거라고만 생각하고 있던 나를 놀리듯 핑크색으로 하늘을 칠한 근사한 그림을 완성하셔서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하도 오래전에 봐서 전체적인 내용이나 방송 제목이나 등등 다른 건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데, 핑크색 하늘로 완성한 그림이 근사했던 것은 아직까지도 기억이 난다.
아마 인상주의 작품들이 처음 등장했을 때의 느낌이 이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에이~ 뭘 이렇게 형체도 없이 흐릿하게 그려놨어~’하다가 ‘보다 보니 근사한데?’가 되는.

모네의 <수련>은 전시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나누는 느낌으로 전체 전시의 중심점 쯤에 자리하고 있었다. 수련은 여러 점의 연작으로 구성된 작품들로 알고 있는데 전시에 온 건 한 점뿐이었지만 이제부터 모네의 <수련>이 어떻게 미국 인상주의에 영향을 주었는지 그 포문을 여는 키포인트로 적절한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모네의 작품이 미국 화단에 영향을 미치게 된 스토리는 이러하다.
1890년대 후반부터, 인상주의의 시작이자 당대 예술의 중심지였던 프랑스 파리의 인상주의 작품들이 미국에서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미국의 갤러리나 미술관, 옥션 같은 곳에서 열정적으로 인상주의 작품들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미국의 화가들도 파리로 유학을 하면서 인상주의 화풍을 익혔다고. 특히 이번 전시의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는 우스터 미술관이 인상주의 작품 수집에 열을 올렸던 것 같다. 모네의 <수련>을 들여오기 위해 주고 받은 서신이나 행정서류 등을 보니 얼마나 애써서 들여오려고 했는지 느껴졌다.

모네의 작품을 기준으로 전시 후반부는 미국의 인상주의 작품들을 주로 전시하고 있는데, 미국의 인상주의 작품들은 익숙한 인상주의 작품의 느낌도 있었지만 뭔가 미국스러운(?) 조금 건조한 느낌도 있었다. 프랑스 인상주의 풍경화들은 촉촉하고 물기 있고 약간 아기자기하고 부드러운 느낌이었고, 미국 인상주의 풍경화들은 건조하고 좀 장대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역시 화가 자신의 눈에 보이는 인상을 그리는 인상주의답게 자연환경의 차이도 인상으로 그려냈나 보다.



이런 인상주의 화가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비판에 맞닥뜨리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인상주의는 풍경화밖에 없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워낙에 바깥 풍경 위주로 빛과 색을 실험하는 작품들이 많았다 보니 그런 비판을 받기도 했다는 것인데, 이후 그림의 사조는 추상화의 세계로 나아간다고 되어 있었다.

나는 이렇게 어떤 사조를 중심으로 하는 미술전을 보면 늘 생각하는 것이 있는데, 어떤 시대던 가장 용감한 사람들은 바로 예술가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앞 시대를 배우면서 자랐더라도,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여는 건 비판을 받으면서도 용감하게 자신의 생각을 예술로 드러내는 예술가들이구나를 또 한 번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는 모네의 <수련> 작품 중 한 점을 직접 자세히 찬찬히 보았으니 그림도 머릿속에 잘 저장해둬야겠다고도 생각했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잘 모르고 있었던 모네를 만났고, 전혀 몰랐던 미국 인상주의의 세계를 만나서 뿌듯한 마음으로 전시관람 완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