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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 풀밭에서 피크닉을 즐기는 공원에서도 보살상을 발견하는 레이더가 있는 사람으로써 - 실제로 처음 가본 부산시민공원에서 비로자나반가석상과 협시보살상을 발견한 1인 - 서울의 어지간한 박물관이나 전시관은 대충 그 존재를 알고 있는 편인데, 알고 있기만 하지 못 가본 곳들이 꽤 있다.
그중에 대표적인 전시관이 헌법재판소 전시관이다.
전시관이 있는 건 한 2~3년 전에 알았는데, 주말에 북촌한옥마을을 기행이든 답사든 나들이든 왔다갔다 하면서 알게 되었다.
알았지만 가지 못한 이유는 여기가 평일에만 관람이 가능하여- 그 근처를 주로 주말에만 다니는 나로써는 들어가 볼 재간이 없었고, 평일에 시간이 나게 되었을 때는 계엄과 탄핵으로 연일 시끄럽고 헌법재판소 앞이 화환이며 집회며 경찰이며 가득했었다. 나라가 위기인데 한가하게 전시 관람을 하고 있을 때도 아니었고.
그러다가 마침 평일에 북촌한옥마을에 갈 일이 생겨서 첫 방문을 해보게 되었다.
헌법재판소 앞 인도가 아주 말끔하니 더욱 뽀얗고 널찍해 보이는 것이, 아마 이번 탄핵심판 때의 헌법재판소 안팎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해서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관은 헌법재판소 정문과 연결된 부속건물에 위치해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보안검색대가 있어서 약간 움찔하게 되지만 직원분이 아주 친절하게 맞아주시며 안내해 주시니 쫄지 말지어다. 안내에 따라 가방만 검색대에 밀어넣고 통과하면 보안검색은 끝이다.
그리고 바로 오른쪽에 전시관이 있는데, 한눈에 봐도 규모는 참 아담해 보였다.
전시 초입에는 헌법의 정의와 개요, 우리나라 개헌의 흐름에 대한 전시가 있었다. 이 부분에서 포인트는 우리나라 개헌사이긴 한데, 우리나라 헌법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고조선 8조법부터 시작하는 것이 맞나 하는 의아함이 좀 들었다. 나는 헌법이 법을 구성하는 테두리이자 기준이라고 생각했는데 고대국가의 법들은 요즘으로 치면 규칙이나 시행령, 조례에 더 가까운 성격인 것 같아서. 물론 우리 역사에서 '법'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가장 오래된 규정이 고조선 8조법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올린거겠지라고 생각하기로했다.
또 하나, 나의 시선을 끌어당긴 것은 애초에 헌법이 어디에서 유래했는가를 다룬 패널이었다. 기억 저편에 밀어놓았던 서양사 절대왕정 이후 시기를 소환하는 영국의 마그나 카르타(대헌장)과 미국 독립선언문, 프랑스혁명 같은 단어들이 뿅하니 나타났다. 그래도 기억 저편에 밀어놓기만 했지 완전 버리지는 않은 모양인게 마그나 카르타도 텍스트를 보자마자 아, 이거 대헌장이었지? 가 떠올랐다. 이건 아마 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흘러가듯 본 이후로 처음 본 것 같은데 ㅋㅋ 무려 1215년에 만들어졌구나. 1215년이면 고려시대 때겠다. 찾아보니 무신정권 최충헌과 최우가 실권을 잡았던 고종 2년이라고. 생각보다 이른 시기에 헌법을 향한 첫 걸음을 뗀 것이 놀라웠다.
그리고 두 번째로 놀란 포인트는 프랑스혁명의 결과가 문서로 정리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이른바 인권선언보다 미국의 독립선언이 한 10년 정도 이르다는 점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보통 서구 사회의 혁명사를 배울 때 영국 산업혁명-프랑스 시민혁명-미국 독립전쟁 순서로 배워가지고 이게 시간의 순서와 동일하게 인식되었나보다. 마치 우리가 고구려-백제-신라 순서대로 얘기하니까 건국 순서도 이 순서대로인 것처럼 느끼듯이. 프랑스혁명보다 조금 먼저 있었던 일이구나, 이게.
시간 순서와 사건 순서, 인과관계가 중요한 역사를 공부하고 좋아하는데 숫자에는 무지막지하게 약해서 이런거 봐도 봐도 놓치는 1인 ㅋ 그나마 초중등 때 태정태세문단세 이렇게 안 외웠으면 아직도 조선 왕들의 순서 헷갈렸을지도 ㅋㅋ 으이그, 바보야~라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뒤를 도니 1987년에 확정된 현재의 헌법 문서가 눈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최근이네 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패널을 읽어보니 우리나라 헌법재판소의 역사도 생각했던 것보다도 길지가 않았다. 나는 현대 정치사 공부하는 걸 진짜 진짜 싫어했는데 그럼에도 아니 할 수는 없어서 보면서 기껏 민주공화국을 만들어놓고 대체 왜 이랬을까 의구심을 가진 적이 많았다. 최대한 열심히 생각해서 내린 결론은 이 시기까지는 민주주의가 뭔지, 그거 어떻게 하는 건지 잘 몰랐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민주주의가 뭔지, 법치주의가 뭔지, 어떻게 하는건지 잘 몰랐던 시절이 꽤 길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깨달은 쪽과 깨닫지 못한 쪽, 이해한 쪽과 이해하지 못한 쪽의 수많은 싸움이 있었던 것이 개헌의 역사겠다. 이상하게 권력자들이 꼭 그렇지 못한 쪽이었던 것이 안타까움이라면 안타까움이고.
그리고는 헌법재판소의 재판이 일반 재판과 무엇이 다른지와 헌법재판의 종류, 헌법재판 중 특이 기록 사건 같은 재미있는 내용이 이어졌다. 스탬프 투어가 있었는데 첫 번째 코너에는 스탬프 용지만 있고 스탬프가 없어서 아쉬웠지만 나는 포기가 빠르니까 ㅋ 다음에 언젠가 또 오게 되면 그때는 있겠지- 아쉬움을 달래며 걸음을 옮기니 옛날 일드 같은데서 봤던 통돌이식 뽑기 기계가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얘가 왜 여기서 나와? 하는 순간 설명 패널을 보고 한층 더 웃었다. 이게 사건 배당 기계였다고? 법복 입고(실제로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진지하게 이거 돌리셨을 엘리트 법관님들을 생각하니까 웃겼다. 나는 이걸 옛날에 일드에서 동네 한량이 상점가를 돌아다니다가 얼결에 아이스크림 하나 더 같은 걸 뽑는 장면으로만 봐서 헌법재판소에서 사건 배당할 때 썼다는 게 좀 충격이었다. ㅎㅎ 물론 지금은 전자배당으로 한다고. 우리나라는 전자화, 디지털화가 빠르니까 뭐든- 아날로그 시절에 이 통돌이 뽑기 기계 말고 다른건 뭘 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기도 하다.
그렇게 아날로드 시절의 전시물을 지나고나면 또 매우 현대식 전시 공간이 나타난다. 헌법재판소 설치 이래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던 사건과 그에 따른 사회적 영향이 정리되어 있는데 호주제 위헌 결정이나 동성동본 혼인 관련 같이 사회적인 것에서 가장 최근 대통령 탄핵까지 생각보다 다양한 분야에서 헌법소원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놀라웠다. 그런데 이 사건들 중에서 수도 이전 문제도 있었다. 수도가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건가? 수도 이전에 대해서 헌법소원을 할 일이 뭐지? 싶었는데 패널을 봐도 영 이해는 되지 않았다. 난 수도 이전이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수도가 서울인게 '관습헌법'이라서는 이상한 이유인 것 같았다. 근데 관습헌법은 또 뭘까? 법 제정이나 집행을 관습적으로 안 할려고 헌법을 만든게 아닌가? 의문투성이였지만 곧 영상실과 포토존에 눈이 팔리고 나만의 헌법 만들기 같은 체험 기계의 유혹에 빠져 신나게 즐겼다. ㅎㅎ
헌법재판소 전시관은 주말에는 운영을 하지 않고 또 전시 규모도 아담해서 뭔가 단독으로 가기엔 좀 부족한 측면이 있지만 평일에 북촌이나 창덕궁이나 인사동 일대를 목적으로 두고 들러서 보기 좋을 것 같다. 그리고 특히 탄핵과 내란, 계엄 같은 단어를 제대로 뜻도 모르면서 유행어처럼 쓰는 요즈음의 어린이님들 모시고 가족 단위로 둘러보는 것도 좋겠다.
이렇게 또 짧지만 알차게 나의 1회차 관람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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