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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옆동네 마실도 쉽지 않았던 시절, 한반도의 등허리를 훑고 다닌 여인

 

최근 유튜브에서 한 중국드라마의 트레일러 영상을 보게 되었다. 제목이 <작작풍류>인데, 짧은 트레일러 영상만으로 흥미를 끄는 구석이 있었다. 황제의 동생인 남자주인공이 오래 전 폐지된 여자회시(과거시험)을 부활시키는데 성공하고, 지방의 부유한 집안 서녀인 여자주인공이 집안의 결혼 압박을 피해 도망치듯 도성으로 올라와 여자회시에 합격해 관직에 오른다. 남자들만 있는 관직 세계에서 여자가 함께 하기란 쉽지 않은 일, 아마도 갖은 우여곡절을 남자주인공과 함께 겪을테다. 어쨌든 남녀 주인공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방향으로 드라마는 진행되는 듯 하지만 여자가 과거시험을 보고 관직에 나간다는 설정 자체가 꽤나 신선했다.

 

이 신박함은 실제 역사 속에서 이런 일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짐작에서 온다. 드라마 상의 설정은 가상의 어느 나라겠지만 그게 어떤 나라이든 사극인데, 관직에 나가 나랏일을 하고 싶은 여자와 그런 연인을 위해서 뒤에서 외조를 하겠다는 남주라니. 

 

이런 설정이 신선한 이유는 동양이든 서양이든 그런 적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시피 우리가 전통이라 인식하는 조선후기 또한 여성들의 사회 활동은 쉽지 않았다. 아니, 쉽지 않다 정도가 아니라 금기시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대충 집 밖으로만 나가려고 해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쓰개치마를 뒤집어쓰고 더듬더듬 다녀야 했던 시절. 그런데 이러한 사회 풍조 속에서 용감하게 남장을 하고 여행길에 오른 여인이 있었다.

 

14세의 김금원.

지금으로 치면 중학교 1학년 꼬마 아가씨가 남장을 하고는 원주에서 출발해 제천 의림지 등 인근 지역을 돌아보고 금강산으로 갔다.

 

김금원은 몰락한 양반댁의 서녀였다. 몰락한 양반집의 적녀도 아니고 서녀였으니 그녀의 미래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성년이 되면 잘 풀려서 어느 집 소실로 들어가는 것이 가장 베스트였을 운명. 그런데 김금원은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한 탓에 몸을 쓰는 집안일을 배우지 못했다고 한다. 대신 그녀의 부모는 그녀에게 글공부를 시켰다. -단순히 몸이 약해서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부모가 애지중지 그녀를 아끼지 않았다면, 그녀에게 총명함이 없었다면 여자아이가 자주 아프다고 해서 글을 가르쳤을까?- 그리고 이렇게 어릴 적부터 성현들의 글을 잔뜩 읽고 세상을 간접경험한 14살의 김금원은 부모에게 폭탄선언을 한다. 직접 세상을 돌아보고 싶노라고.

삼가 내 삶에 대해 생각해보니 금수로 태어나지 않고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다행이고, 오랑캐의 땅에서 태어나지 않고 우리 동방의 문명한 나라에 태어난 것이 다행이다. 그런데 남자로 태어나지 않고 여자로 태어난 것이 불행이요, 부귀한 집에 태어나지 않고 한미한 집에 태어난 것도 불행이다.
하지만 하늘이 이미 나에게 어질고 지혜로운 성품을 주시고, 귀와 눈을 만들어 주셨으니 어찌 산수를 좋아하고 즐기며 견문을 넓히지 못하겠는가.
(중략) 여자로 태어났으니 깊은 담장 안에서 문을 닫아걸고 법도를 지키는 것이 옳은가.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처지대로 분수에 맞게 살다가 이름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옳은가.
- 김금원, <호동서락기> 서문 중에서

당연히 부모는 반대했다. 조선팔도 천지에 여자애 혼자서 여행을 다니는 것은 본 적이 없으니 딸이 품은 세상을 향한 열망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는 법인가 보다. 딸의 끈질긴 설득에 부모는 그녀의 여행을 허락했다. 

 

김금원은 남자처럼 상투를 틀고 나귀를 타거나 사방이 뚫린 가마를 타거나 혹은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거나 하는 방식으로 금강산까지 돌아보고 난 뒤에 관동팔경을 샅샅히 여행한 후, 설악산에 서울까지 정말 야무지게 돌아보고서는 ‘이제 족함을 알고’ 본분으로 돌아가겠다며 어느 양반댁의 소실이 된다. 그러나 한 번 코에 바람이 든 사람이 족함을 안다고 엉덩이 붙이고 앉아만 있을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김금원은 남편의 부임지가 의주로 정해지자 따라 나서 의주의 풍경과 풍속을 남겼다. 

정선 필 <금강전도> - 김금원보다 약 100여 년 전에 정선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내금강 전도

향기로운 곳 돌아드니 경치 더욱 새롭고
지는 꽃 향기로운 풀에 속된 마음 슬퍼하네.
제법 물오른 나무 빛으로 봄은 그림 같고
콸콸 흐르는 샘물 소리 골짜기에 넘친다.
달은 겨우 보름 지났는데
고향 그리워도 다른 몸으로 변하기 어렵구나.
깊은 산속 해가 지는데 훨훨 날아가는 학이
모두 간밤의 꿈에 본 사람이라.

- <호동서락기> 중에서, 김금원이 금강산 금강문 일대에서 읊은 시

 

호동서락기에 남은 김금원의 여행 루트

김금원이 여행을 시작한 때는 경인년(1830년) 봄 삼월. 김금원이 호동서락기에 남긴 대표적인 지명들을 아래와 같다.

 

[제천] 의림지 - [단양] 상중하선암, 사인암, 금화굴, 남화굴 - 제천 (청풍) 옥순봉 - [금강산] - [관동팔경] 통천 총석정, 고성 삼일포, 간성 청간정, 양양 낙산사, 강릉 경포대, 울진 망양대, 평해 월송정, 삼척 죽서루 - [설악산] - [한양] 남산, 창의문, 세검정, 탕춘대, 삼계동(현 부암동 일대, 석파정 인근), 백사실계곡,정릉 일대, 숭례문, 관왕묘(동묘)

명칭표기지도 출처 : 국토지리정보원

그녀의 기록에 남은 여행지를 헤아려보니 지금까지도 명승지로 이름 난 곳이 대부분이다. 일단 원주에서 출발해 인근 지역의 핫플을 둘러본 뒤에 금강산을 꼼꼼히 둘러보고, 동해 라인을 따라 강원도 핫플 top8인 관동팔경을 다 둘러본 뒤 설악산에 올라갔다가는 이제 슬슬 대도시가 보고 싶다며 한양으로 갔고, 요즘으로 말하면 한양도성 스탬프 투어 하듯이 한 바퀴를 죽 돌아본 셈이다. 각 지자체에서 김금원의 루트를 따라서 여행상품을 개발해도 되겠다 할 정도. 물론 그녀 시대의 관동팔경은 분단의 현실을 사는 지금 우리 시대의 관동팔경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김홍도 필 <총석정도>

  

 

재능 넘치는 첩들의 시사, 용산 삼호정 모임

이후 김금원 일가는 한양에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그녀는 그곳에서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시사를 결성했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이 참 인상적이었다. 조선 후기 특히 정조 이후 그동안 하찮은 기술 정도로 여겨졌던 학문 분야가 비약적인 발전을 하기 시작했다. 실용적인 학문이라는 ‘실학’의 등장과 함께. 사실 그동안 양반들이 공부하기엔 너무나도 전문적인 기술직들이었던 의관, 율관, 역관 등은 잡직이라 하여 주로 양반댁 서얼들이나 평민 중에서 여유가 있는 집안 자제들이 맡아왔는데 이 분야들의 중요성이 강조됨에 따라 이들의 사회적 지위나 기여도가 높아지게 된 것이다. 그러자 이들은 자신들도 양반님네들처럼 시를 짓고 음률을 즐기는 등의 모임을 가지게 되는데 이를 시사라고 했다. 제일 유명한 시사가 지금의 서촌 자락에서 모임을 가졌던 송석원 시사다. 그런데 이를 여성들도 만들어서 운영했다니. 김금원을 주축으로 결성된 이 시사는 그녀의 여동생 경춘(주천 홍태수의 소실), 운초(연천 김상서의 소실), 경산(화사 이상서의 소실), 죽서(송호 서태수의 소실) 등이 멤버였다. 모두 소실인 것을 미루어 보면 김금원의 집안과 비슷하게 몰락한 양반 가문의 서얼이거나 중인 집안의 여식이지 않았을까. 보통 정실부인의 처지보다 소실의 처지가 좋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하지만 이렇게 모임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을 보면, 또 삼호정 시사 모두가 시와 서에 능했다는 것을 보면 양반댁 안채에 갇혀서 현모양처의 가치관에 묶여 있던 양반의 정실부인보다 자유로운 처지였을지도 모르겠다. 

현재 마을 공원에 남아있는 삼호정 터 표지판

이들은 삼호정 시사를 통해 서로 시를 짓고 함께 감상하거나 문학적 담소를 나누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 끝에 김금원은 ‘세상에 김금원이라는 이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목적으로 여행기를 남겼다. 문학 모임을 하면서 문집을 엮어내는 활동을 한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이러한 활동을 했고, 지금도 사실 크게 다르지 않은 여러 동호회나 소모임을 보면 인간이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어떤 식으로든 표현해 내고, 그것을 함께 나누고 싶어 하는 것은 인류의 보편성이자 시대를 초월하는 기본적인 욕망이 아닐런지.

 

참고자료 : 여성, 오래전 여행을 꿈꾸다(김경미 엮고 옮김, 2019년, ⓒ나의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