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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인가 17년쯤에 한창 골목기행이 인기를 끌던 시기가 있었다. 북촌 한옥마을의 뒤를 이어 서촌이 주목을 받았고, 익선동에 크고 작은 특색있는 가게들이 들어서면서 구석구석 골목골목에 쌓인 시간을 가늠하는 골목기행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었다.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줄곧 대도시였던 서울이 특히 골목마다 이야기가 없는 곳이 없어 각 구마다 열정적으로 그런 골목들을 발굴하고 콘텐츠를 만들어내기 시작할 무렵, 서대문형무소가 내려다보이는 언덕빼기에 작은 양옥집이 세간의 관심을 모았던 기억이 있다.

 

지금이야 마음이 가는대로 답사나 여행을 할 뿐이지만-물론 관련해서 일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때만 해도 지금보다 더 업무적으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 집이 바로 딜쿠샤. 이름도 특이한데 내력도 독특해서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에 외국인이 지은 집인데다가 딜쿠샤라는 말이 인도어인가 아랍어인가 어느 나라 말인가 싶어서 신기했던 것이 첫 기억.

 

당시만 해도 일곱 가구인가가 그 작은 2층짜리 양옥집에 살고 있었던가 해서 서울시에서 이 일곱 가구와 이주 협의를 해서 복원을 할 계획을 세웠다는 것까지만 아는 상태에서 기억의 한쪽으로 밀어두었다.

 

그러다 복원을 완료하고 전시관으로 오픈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도 뭔가 타이밍이 어긋나 못 가고 있던 것을 얼마 전에 드디어 다녀오게 되었다.

 

경찰박물관에서 500m만 걸어가면 되는 곳에 딜쿠샤가 있기에 더운 날이었지만 수업을 마친 후에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경찰박물관에서 걸어가니 사직터널 위를 지나게 되는구나. 길치 오브 길치인 나는 사직터널로 가는 길과 터널 위로 향하는 길이 갈라지는 지점에서 엄청나게 망설였지만 오늘은 찍기 성공!

예쁘장한 빨간 벽돌집으로 복원된 딜쿠샤는 금방 눈에 들어왔다. 뭔가 내 기억 속 딜쿠샤는 아직 사람이 살던 시절이라서 뭔가 창고 같은 확장된 공간이 있었던 것 같은데, 복원된 딜쿠샤는 되게 예쁘게 작아진 느낌이었다. 이전에는 여기에서 7가구가 어떻게 살았지?

 

머릿돌에도 멋들어지게 성경 장절이 새겨져 있어서 뭔가 더욱 분위기가 있게 느껴졌다. 이 집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앨버트 테일러가 감리교 신자였던 이유로 성경은 개신교 성경구절로 소개되어 있어서 나에게는 약간 어색했지만 이게 맞지, 그가 감리교 신자였으니까. 오히려 복원이 세심하게 되었구만- 이라고 생각하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에는 밖에 가방을 보관할 수 있는 통이 있어 그곳에 가방을 벗어놓고 별도로 마련된 슬리퍼를 신고 들어가야 했다. 가방 보관함이 아니라 그냥 통이어서 좀 당황스럽긴 했으나 굳이 여기까지 누가 와서 내 가방을 들고 가지는 않겠지.

건물 내부는 전형적인 서양식 주택인 느낌이었다. 가운데 거실이 있고, 양옆에 날개처럼 방 몇 개를 둔 형태의 2층 집으로 1층과 2층의 구조는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공간 하나하나는 크지 않지만 잘 나뉘어 있어서 직원용 사무실과 화장실을 빼고도 전시 공간이 꽤 있었다.

처음 들었을 때부터 인도어인가 의심했던 집 이름 딜쿠샤는 페르시아어로 기쁨의 집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앨버트 테일러는 아내 메리 테일러와 인도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을 겸해 몇 개월에 걸쳐 한국으로 왔다고 하는데, 어떤 궁에서 딜쿠샤라는 이름이 붙은 건물을 만났고 아내 메리 테일러는 그때부터 집을 짓는다면 이름을 딜쿠샤로 짓고 싶어 했단다.

 

한국에서 광산 주인의 아들이자, 상회와 골동품점 대표이자, AP통신 한국통신원이기도 했던 앨버트 테일러는 한반도의 역사가 가장 격렬하게 시대의 격랑에 휩쓸리던 시절에 이곳에 있었다.

 

처음에는 서대문구의 다른 동네에 살고 있었는데, 메리 테일러가 은행나무가 멋들어지게 서 있어서 행촌동이라고 불린 이 자리에 집을 짓고 싶어했고, 주인이 없었던 이 땅을 앨버트가 매입해 마침내 딜쿠샤라는 집을 지었다고 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주민들의 반대가 격렬해 어려움도 겪었다고. 메리에게는 멋진 풍경으로 보였을 아름드리 은행나무는 아마 당시 동네 주민들에게는 마을을 지키는 당나무였을테니까 여기에 집을 짓는 것을 싫어했을 법도 하다. 이렇게 양쪽이 다 이해가 되어 편을 들 수가 없을 때가 있다.

연극배우였던 메리 테일러는 예술 쪽으로는 전반적으로 재능이 있었나보다. 딜쿠샤에서 함께 지냈거나 알게 되었던 조선 사람들의 초상화를 남겨놓았다.

 

여하튼 이렇게 언덕 위에 2층짜리 서양식 주택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테일러 가족은 여러 역사의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앨버트 테일러가 겪게 된 역사적인 사건은 크게 보면 2개의 사건 정도를 꼽을 수 있다. 하나가 3.1운동이고 다른 하나가 제암리학살사건이다.

19192월 말에 아내 메리 테일러는 출산을 위해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유난히 밖에서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였고, 228일에 아들 부르스 테일러가 태어난 밤에 어떤 청년이 메리의 침상으로 종이 뭉치를 쑥 집어넣고 사라진다. 태어난 아들을 보러 온 앨버트는 유창한 한국어 실력 덕에 그 종이 뭉치가 독립선언서임을 알아보고 일본으로 출국하는 동생에게 그 종이 한 장을 건넸다. 동생 윌리엄 테일러는 구두 뒷축에 독립선언서를 감춘 채 도쿄로 출국, 본국인 미국 AP통신사에 전송했다. 이렇게 독립선언서 전문이 해외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조선에 들어온 1세대 광산 개발자의 아들이 3.1 만세운동을, 독립을 열망하는 그 마음을 어떻게 이해해서 이걸 보도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걸까.

나였다면 이럴 수 있었을까. 역사를 공부하며 역사 인물들에 감정을 이입해보거나 상황을 대입해 보곤 하는데, 나는 아마도 최대한 용기를 쥐어 짜내도 그 독립선언서 뭉치를 묵인하는 것까지 밖에 못했지 싶다. 뭔가 일제에 제보하는 것도 무서워서 못했을 거 같고,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도 무서웠을 것 같으니.

 

한편으로 생각하면 하필이면 부르스 테일러는 3.1운동 전날에 태어나서 메리가 입원을 하고 있었고, 하필이면 독립선언서를 세브란스에서도 인쇄를 했고, 그걸 결국 한국어를 잘 아는 앨버트가 보았고, 하필이면 그의 동생이 곧바로 출국을 했고... 우연이 계속 겹쳐 잘 짜여진 작전같이 만들어졌다. 이런 걸 보면 3.1운동은 일어날 운명, 많은 사람들의 염원에 의해 반드시 일어날 운명을 가진 사건일지도 모르겠다.

제암리 학살사건은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봤을 때부터 너무 잔인하고 끔찍해서 나중에라도 다시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어서 자세히 알지는 못하고 감히 자세히 들여다 볼 엄두가 여전히 안 나는 사건이다. 하지만 그나마 이를 소수의 외국인 기자가 보도를 하면서 알려졌다는 것은 알고 있는데-이게 유일한 지식- 여기에 앨버트 테일러도 관여했다고 한다. 일제는 당시 제암리 학살 사건이 알려지지 않게 하려고 애를 썼다는데, 자기들도 잔인한 만행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나 보다. 그러니까 자기들도 나쁜 짓이라는 거 아는데 왜 하는거야, 서양인들 눈치는 겁나 봤으면서.

 

이렇게 한국의 독립운동사에 깊이 관여했던 앨버트 테일러와 메리 테일러 부부는 1942년 미국과 일본의 태평양 전쟁이 격화되면서 외국인 추방령에 따라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미국으로 돌아간 테일러 부부는 공장노동자로 생활했다고 하는데, 앨버트 테일러는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고. 그러면서 자신을 작은 함에 담아 메리가 조선으로 데려다줬으면 한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저 유언을 남길 때의 마음이 어떤 마음일지 잠깐 생각해봤다. 조선에 있으면서 힘든 일도 많았을테고, 조선 사람들과 갈등도 적지 않았을테지만... 추방령으로 떠나게 되었으니 다시 갈 수 없는 곳이라 더더욱 그리웠을지도 모르겠다. 언제든 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리움이 덜할 수도 있는데, 이제 다시는 못 간다고 생각하면 죽어서라도 가고 싶은 정도의 그리움이 될지도.

 

1층에서만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게 되다니, 진짜 생각 자체가 많아져 있기는 한가보다.

2층은 구조 자체가 1층과 비슷했는데, 벽돌을 쌓아 올린 기법에 대해 설명하는 전시물이 따로 있었다. 건축쪽으로는 문외한이지만 보고 이해한 바에 의하면 벽체를 벽돌로 다 채운 것이 아니라 공간을 두고 쌓아올렸다는 것 같았다. 이게 뭐에 좋은 건지, 어떤 효과가 있었던 것인지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복원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라고 하니 왠지 재밌는 포인트로 느껴졌다.



그리고 2층에서는 자꾸 창밖 풍경을 쳐다보게 되었다. 옛날 옛적에 공부한다고 읽었던 <호박목걸이> 책에서 메리 테일러가 딜쿠샤에서 서대문형무소가 보였다고 했던 대목이 꽤 오래 기억에 남아있었기 때문에. 사실 기억에 그 부분만 있다. 그래서 자꾸 진짜 보이나 싶어서 밖을 내다보게 된 건데 지금은 당연히 안 보인다. 주변에 딜쿠샤보다 높은 건물이 많으니까. 하지만 방향이나 거리를 생각하면 당시에는 보이긴 보였겠다.

뭔가 내가 기억하는 유일한 부분에 대한 경험적 근거를 얻은 것 같아서 괜히 뿌듯. 이게 뭐라고 뿌듯씩이나 싶어 스스로 좀 웃겼는데 그래도 어쨌거나 당시를 잠시 머릿속에 그려보며 납득했으니 뿌듯은 좀 과장이라고 해도 흡족 정도 까지는 괜찮겠지.

 

열심히 공부했던 1층과 달리 2층은 가볍게 돌아보며 사진 찍기 위주로 관람하고 나왔다.

 

작은 건물이라 한 30분이나 보려나 한 것 치고는 전시 내용이 많고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 꽤 오래 꼼꼼히 보고 나왔다. 다 보고 나와서 다시 한 번 건물을 눈에 담으니 참 아담하고 예쁘다. 역시 나의 미적 감각은 고전적이야.

폭염과 폭우가 오락가락 하는 시즌에, J답지 않게 급 결정한 방문이었지만 아주 만족스러운 시간을 이렇게 길고 길게 남겨두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