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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고려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유적지는 많지 않다. 모든 나라의 모든 것의 중심지가 수도라는 것을 감안하면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은 현재 대한민국 영토 안에 없기 때문에. 그래서 고려 이야기는 대몽항쟁기에 임시 수도였던 강화도나 고려 인쇄술의 첫 번째 역작인 팔만대장경이 있는 합천 해인사, 그리고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물인 직지심체요절이 만들어졌던 청주 흥덕사 정도를 제외하면 국립중앙박물관일 것이다.

써놓고 보니 그래도 꽤 있어 보이기는 하는데, 고려를 테마로 엮기엔 압축적이지 않아서 통일성 있게 코스를 짜기엔 쉽지 않다. 그래서 항상 아쉬운 느낌이 있었는데 최근 지인이 경기도 안성이 고려로 여행을 할 수 있다고 해서 함께 다녀왔다.

 

안성은 안성탕면과 바우덕이 남사당놀이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고려라니! 이것은 유레카다!

첫 코스는 죽주산성. 죽주산성은 분명히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는데 그냥 이름이 좀 익숙하게 느껴졌다. 내 안에서 뭔가 드디어 죽주산성에 가보는구나 싶어서 살짝 설렜는데, 이 설렘에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설경이라는 사실을 놓쳤다. 가는 내내 산에 눈이 쌓여있어서 되게 예쁘다고 감탄만 하면서 우리가 지금 가는 곳이 산성이라는 것을 간과하다니.

죽주산성은 큰 산성이 아니라서 일단 올라만 가면 금방 한 바퀴 돌 수 있다고 했는데 올라가는게 문제였다. 입구에 서니 맙소사- 눈이 쌓여있잖아. 나의 한라산 등반 동지였던 등산화 친구를 신고 올걸, 그냥 운동화를 신고 와가지고- 큰일이다. 그나마 올라가는 건 올라갈 수 있는데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내려올 때가 문제겠다. 그러나 나의 첫 죽주산성을 포기할 수는 없지.

눈 쌓인 경사길을 기어이 올라가서는 오동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는 중성 동북치 위까지 올라가 주변 전망을 훑었다. 그리 높은 고도는 아닌 느낌이었는데 아래에 펼쳐진 풍경이 다소 깊은 느낌이 들었다. 눈이 온 뒤여서 그런가. 출발 전 죽주산성을 인터넷에 검색해 봤을 때 뉴진스가 여기서 뮤직비디오를 찍었다는 걸 봤었다. -뮤직비디오도 봤는데 음악이 너무 내 취향이 아니라서 기억에서 날리기는 했다.- 뮤직비디오 감독은 이 풍경을 어떻게 뮤비에 쓸 생각을 했을까, 대단한걸. 음악과 편집이 확실히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죽주산성은 몽골의 3차 침입 때 15일 동안 몽골군을 방어하며 버텨내어 결국 퇴각하게 만들었던 장소다. 이 방어전 승리의 주역은 송문주라는 장군이었는데 그는 이미 이전에 귀주성에서 몽골군과 싸워본 경험이 있어서 몽골군의 공성전술을 잘 알고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적절한 방어 전략 수립과 효율적 작전 지시로 몽골군을 물리쳐 신명(神明)이라고 불렸다고. 강화도에 들어간 최씨 무신정권에서 송문주 장군을 죽주산성으로 파견한 것은 이곳이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가는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중부고속도로가 지나가는 곳이니 예전부터 중요한 길목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죽주산성은 중성과 내성, 외성까지 세 겹으로 지어진 성인데 외성은 탐방이 불가하고 중성과 내성은 한 바퀴 돌아볼 수 있었지만 현재 뽀얗게 눈이 쌓여있어서 순성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올라왔던 그 길로 다시 돌아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에 여러 번의 위기를 겪으며. 눈썰매 탄다고 신나 하기엔 나는 너무 어른이고, 다음 일정 생각 안 하고 눈 위에 몸을 맡기기에 나는 너무 J라 엉거주춤한 자세로 위기를 극복하며 하산에 성공. 날이 풀려서 나무에 초록 잎들이 돋아나고 날이 좋을 때 오면 진짜 좋겠다.

반오리걸음으로 졸졸졸 죽주산성을 내려와 향한 곳은 태평미륵. 위에 씌워놓은 지붕이 좀 모자라보일 정도로 거대한 미륵 부처님은 이목구비의 선이 과하게 또렷하고 얼핏 아이섀도우와 립스틱을 칠한 것처럼도 보였다. 고려시대 미륵 부처님들은 보면 웃음이 난다, 너무 유쾌하게 생겨서. 석굴암 본존불 같은 조화와 균형미를 추구했던 이전 시대에 비해 고려시대의 거대불상은 추구미가 파격적으로 변하는데 이 변신의 결과가 점점 더 귀여워 보이는 것을 보면 나이가 들어가는게 분명하다.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대번에 못생겼다는 평가가 튀어나오고, 예전에 만든 패널 같은 데는 보면 고졸하다는 표현이 빠지지 않는데 이 고졸하다는 건 그냥 촌스럽고 못생겼다는 걸 있어보이게 쓴 표현인 것 같아서 나는 썩 맘에 들지 않지만. 어쨌든 이걸 이제 고려가 건국하고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각 지방의 호족 세력들의 득세와 연결하여 설명하기는 한다. 각 지방마다 유력 호족이 그 지역 유지의 역할을 하면서 정치력과 병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들의 도움으로 집권하고 국정을 운영했던 왕건은 이들을 우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각 지방에서 각각 강력한 불사를 일으켜 커어다란 미륵불이 많다는 것으로. 이건 역사학에서 하는 해석이고, 나는 고려시대의 미륵불들을 볼 때마다 뭔가 신을 이렇게 재미나게 표현할 수 있었다는 불교의 포용력에 놀라곤 한다. 내가 믿는 신은 완벽하고 이상적으로 멋있게 표현하고 싶은게 상식적인 것 같은데, 어째 이렇게 우리 옆집 또는 옆옆집에 있을 것 같은 얼굴 생김새로 만들 수 있었을까. 우리나라는 귀신이나 요괴도 엄청 무서운 애들은 별로 없는 것을 보면 옛날부터 귀신 같은 것도 별로 무서워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신도 이렇게까지 친근하게 생각했었나. 하여튼 우리나라 사람들 담력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 이런 생각이 든달까.

다음으로는 갈 수 있을까 없을까 반반의 가능성을 가지고 일단 가보기로 한 국사암으로 향했다. 반반의 가능성인데도 일단 가보기로 했던 이유는 교과서에 궁예 파트에 등장하는 궁예미륵이 있기 때문이었다. 거의 유일한 궁예 관련 유물임에도 이런 기회가 아니면 직접 보기가 힘들기 때문에, 혹시나 올라가는 길에 눈이 녹지 않았다면 못 가겠지만 그래도 혹시 눈이 치워져있을 수도 있으니까 가보자 했다. 국사암에 올라가는 길은 경사가 엄청나서 눈이 오지 않았어도 보기가 쉽지 않겠구나 싶었다. 그래도 차량으로 하는 답사라 여길 걸어 올라오지 않는 것만 해도 아주 몹시 감사하다.

까마득한 경사를 차량님이 힘내어 올라와 주신 덕분에 국사암 바로 앞에서 내렸다. 그리고 곧장 미륵불을 향해서 흰 눈을 밟아가며 직진. 앞서 보고 왔던 태평미륵보다는 조금 더 근엄하고 정제된 생김새에 크기도 아담한 편인 궁예미륵의 공식 명칭은 안성 국사암 석조여래입상이다. 가운데 주불인 미륵불이 있고 좌우로 협시보살이 있는 구성인데 왼쪽의 보살상이 검을 들고 있어서 보자마자 무인석, 문인석인가 싶었다. 오른쪽 보살상이 홀을 들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서 문인석이라고 보긴 어려웠지만 한 번 그렇게 생각이 드니까 자꾸만 조선왕릉에 있는 석인들이랑 얼굴 생김새까지 닮아 보이는 것이- 역시 원효대사 해골물이라고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하도 커다란 태평미륵을 보고 왔더니 3m라는 높이가 상당히 안정감이 있다.

여하튼 이 부처님들이 왜 궁예미륵이라 불리는고 하니, 궁예가 이곳에서 스스로를 미륵이라 칭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고. 궁예가 직접 이 석불상을 만들었다거나 하는 말은 없는 것을 보니 이 일대에 머물렀다는 것 정도만 취하면 될 것 같은 전설이긴 하지만 그래도 후삼국이 경쟁하던 시절에 안성이 중요한 지역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도 볼 수 있겠다.

어렸을 때 나는 궁예라는 인물을 이해하는 게 어려웠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좀 애매하지만 어쨌든 신라 왕실 혈통이라고 했을 때, 왕실에서 버려져 민간에서 불교에 귀의하며 자라면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나라를 세우고 나서는 미륵불을 자칭하면서 관심법이니 뭐니 해 가며 민심을 잃고 부하들에게 밀려났던 그의 이후 행보는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생각했지?’라는 의문 그 자체였으니까. 어떤 자료를 보니까 그가 이렇게 미륵신앙에 기대어 국정을 운영하고 또 나라의 이름도 여러 번 바꿨던 것 자체가 그의 정치적 기반이 약했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하는 자료도 보긴 했는데. 내 정치적 기반이 약하다고 나 스스로 신을 칭하면 기반이 단단해진다고 생각했을까? 궁예는 정말이지 어려운 인물이다. 하지만 책에서만 보던 그 궁예미륵을 눈앞에서 직접 본 것은 확실히 즐거운 경험이다.

궁예미륵을 보고 내려오는 길은 차를 탄 채로 앞으로 고꾸라지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무서웠지만 베테랑 드라이버 지인의 훌륭한 운전 솜씨로 무사히 내려와 마지막 미륵불인 아양동미륵을 만나러 이동했다. 아양동미륵은 또 너무 도시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태평미륵이나 궁예미륵이 산 배경이었던 것에 반해 아양동미륵은 빌라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이만큼이나 사람들의 생활에 가까이 들어와 있었구나를 실감할 수 있었다. 야앙동미륵은 남성형 불상 1기와 여성형 보살상 1기로 되어 있는데, 여성형 보살상이 크기가 커서 눈에 먼저 들어왔다. 이 보살상은 어깨와 팔 부분에 꽃무늬가 있었고 눈동자를 약간 색이 다른 조약돌 같은 걸 박아놔서 다른 미륵들과 마찬가지로 정성을 들여서 친근한 미감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목 부분에 크게 금이 가 있었는데, 설명 패널을 읽어보니 어떤 청년 장수가 이 산 저 산 도움닫기하면서 뛰어다니다가 잘못 밟아서 부러졌다는 전설과 일제강점기에 부러져서 마을 사람들이 십시일반 보수했다는 설이 있단다. 남성형 불상은 좀 작기도 하고 특징적인 부분이 없긴 했지만 두 기가 마을 한 가운데에 함께 있으니 마을 사람들에게는 장승 같은 역할도 했겠다 싶었다. 불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서 민간 신앙을 수용하는 것에 거부감이 적고 자연스러워서 장승처럼 여겼다고 해도 어색함은 없었을테니까.

안성에는 이외에도 쌍미륵이 있다는 쌍미륵사도 있고, 16기의 미륵이 있다고 한다. 왜 이렇게 안성에 미륵석상이 많을까 싶어서 집에 돌아와서 폭풍 검색을 해 보았다. 통일신라 말기, 그러니까 후삼국이 성립하려던 그 시절 안성은 죽주로 불렸고 이 지역에는 기훤이라는 인물이 큰 세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궁예가 처음에 기훤에게 의탁하려고 했었다가 양길에게 갔다는 것을 참고서 같은데서 슬쩍 보고 지나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기훤이 여기 있었구나. 그러니까 이 동네에 궁예도 왔었겠고. 여하튼 지금보다도 더 교통의 요충지였던 이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기훤이 호족 중에서도 일찍 이름을 날렸을 것이다. 그만큼 지역의 결속력도 높았을 것이고 말이다.

그리고 고려 건국 후 이 일대는 왕건의 고민거리로 등극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왕건이 여러 지방 호족들과 다중적으로 혼인동맹을 맺으면서 일부 호족들은 개경에 올라가서 중앙귀족화 되어 갔고 일부 호족들은 그대로 지역에 남아 지역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는데, 이 개경귀족파와 지역호족파의 갈등이 심했던 곳이 바로 이 일대를 포함한 충청도 지역이었다고 한다. 지역 호족들 중에도 왕건에 충성하는 파와 그렇지 않은 파가 엇비슷했던 동네여서 왕건은 혹시라도 이 지역에서 반역이 있을까봐 걱정도 했었나보다. 그래서 왕건이 민심을 살피라고 3명의 신하를 파견했는데 두 명은 반역이 있겠다고 했고 한 명만 괜찮을거라고 했는데, 왕건은 이 한 명의 신하를 자주 보내서 지역을 다독이고 불사를 통해서 지방 세력을 안심시키고 인정해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유난히 친근하고도 독창적인 미륵불이 많이 남아있는 미륵불의 동네가 된 것이구나. 안성탕면의 동네인 줄만 알았더니.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이 동네를 주름잡던 존재가 있었어.

칠장사에 있는 봉업사지 마애불상 - 이걸 보면 고려시대 사람들이 불상을 예쁘게 못 만들었던 것은 아닌게 분명하다

 

나는 예전부터 불국사 다보탑이나 석굴암 본존불을 만들 수 있었던 사람들이 갑자기 표현법이나 기술이 퇴보해서 이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기술이 떨어져서가 아니라면 일부러 고졸하게 만든 것이고 그 이유가 궁금했었다. 그런데 하루에 이렇게 여러 미륵불들을 보고 나니 어쩌면 고려 사람들에게 부처님이 되게 편하고 친근한 존재였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을 바라보는 시각이 마냥 신성하거나 경건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친구같이, 이웃같이 그렇게 바라봤던 것일지도. 그리고 크기에 대해서는 뭔가 랜드마크의 역할을 부여했던 것이 아닐까. 사람들은 아주 옛날부터도 여하튼 크고 거대하게 지어 올리고 싶어했으니까, 지역 세력민들의 마음을 모으고 세력을 보여주려면... 얼굴은 귀엽고 친근하더라도 크기는 거대하게 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또 하나의 고려 답사지가 생겼다는 뿌듯함을 안고 조만간 또 다른 고려의 거대 미륵불인 논산 관촉사 은진미륵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고려 미륵불 답사 끝!

그래도 '안성탕면'의 동네에서 안성탕면을 안 먹고 오기는 아쉬우니 점심은 안성탕면을 끓여먹을 수 있는 카페 풍사니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