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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부코항으로 돌아와 발걸음도 가볍게 버스 센터로 가는데 문득 오징어 동네에서 오징어 꼬다리도 하나 구경을 못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변을 빠르게 스캔해봤다. 평일 오전이고, 이미 아침 시장도 문을 닫은 시간이라서 생물 오징어나 건오징어 또는 오징어구이를 판다는 식당이나 가게들은 거의 영업 준비 중이었던 것 같고, 버스 센터 인근의 기념품 상점에서 아마도 아이스크림을 사 가지고 나오는 커플을 발견했다. 설마 오징어맛 아이스크림은 아니겠지? 그건 너무 괴식이지? 하면서도 워낙에 특산물로 오만가지 관광 상품을 만드는 세상이라 설마 하는 의심도 거두지 못한 채로 홀리듯 들어갔다. 그러고보니 점심도 안 먹었구만. 안에 들어가니 진짜 작은 가게인데 각종 스무디도 팔고, 아이스크림에, 굴이랑 새우도 구워 파는 것 같고 하여튼 별의 별 것을 다 파는 굉장한 가게. 그 많은 품목 중에서 오징어어묵튀김꼬치를 한 꼬치 주문했다. 어디 앉아서 점심으로 먹을만한 양은 아니지만 간식으로 먹기엔 충분한 두 덩어리가 꽂힌 꼬치를 손에 들고 버스 센터로 가서 버스 스케줄을 확인했다.

주문 즉시 튀겨주는 오징어어묵튀김꼬치. 맛은... 오징어칩어묵맛? ㅋ

 

관광 안내소에 가서 가라쓰성에 가고 싶다고 했더니 성 바로 앞까지 가는 버스는 20분 기다려야 온단다. 그래서 그냥 가라쓰 버스 센터로 다시 돌아가는, 지금 바로 오는 버스를 타기로 했다. 날씨가 딱 걷고 싶은 날씨이기도 하고 버스 터미널 벤치에 멍하니 20분 앉아 있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다시 돌아가는 버스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바다를 끼고 굽이굽이 돌았지만 올 때와는 루트가 달랐다. 돌아가는 루트는 그래도 마을들을 지나왔던 올 때 루트와 달리 논이 많은 목가적인 풍경이었다. 그런데 바닷가에 면해 있는 논이라 그런건가 논에 물을 가득 채워놓아서 신기했다. 사실 이렇게까지 바닷가에 붙어 있는 논 자체를 본 적도 별로 없는데다 모내기 전의 논에 물을 이렇게 가득 받아놓은 건 엄청 생소했다. 물론 왜 이런지 찾아보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바다와 물이 가득 찬 논이 한 풍경에 보이는 그림이 재밌기도 했다.

버스에 앉아만 있어도 이런 풍경이 계속 이어지다니

 

다시 또 35분쯤 걸려서 가라쓰 버스 센터에 내려 가라쓰성을 향해 파워워킹을 시작했다. 가라쓰시 시내는 가라쓰성과 가라쓰시청 사이를 격자 구분을 해서 건물을 지은 것 같은 계획된 죠카마치의 느낌이 강했다. 쭉 뻗은 길을 걸어가면 가라쓰신사가 나오고 거기서 또 가로로 쭉 뻗은 길을 따라 가면 가라쓰성이 보여서 길 찾기가 엄청 수월했다. 정말 나같은 슈퍼 길치에게는 길이 꼬불꼬불하지 않은 것만 해도 몹시 고맙다. 게다가 가라쓰성은 무슨 등대같이 바닷가에 면한 언덕에 우뚝 서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진짜 등대 역할을 하기도 했겠다. 워낙에 건물이 등대처럼 우뚝 서 있어서 길을 헤맬 여지가 전혀 없었다. 신나라-

 

그렇게 한 20분을 걸어서 도착한 가라쓰성. 높은 곳에 있는 만큼 입구부터 계단이 어마어마했는데, 안내 지도를 자세히 보니 유료로 엘리베이터를 운영 중이었다. 엘리베이터를 돈 내고 타면 왠지 상술에 지는 것 같으니 계단으로 걸어올라가겠다!

본격적인 계단 등반에 앞서 설명 안내판을 정독했다. 보통은 눈으로 빠르게 스캔하고 사진을 찍어둔 다음에 나중에 찬찬히 읽어보는게 설명문인데, 임진왜란의 전초기지이자 출발지였음이 분명한 곳이라 성의 내력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가라쓰성은 1608년 완성한 평산성이라는 설명으로 시작하는 가라쓰성 입구의 설명 패널

 

가라쓰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근 가신이었던 테라자와 히로타카가 지었다고 한다. 이름이 낯설어 급히 찾아보니 테라자와 히로타카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인근의 히젠나고야성을 짓고 전쟁을 지원하였고, 1597년 정유재란 때는 부산으로 건너가 부산을 지키는 역할을 했다고. 가라쓰성을 임진왜란 때문에 지은 것은 아니었군. 완전 임진왜란 때문인 줄 알았는데... 이래서 미리 공부를 하고 오는 게 중요한데- 너무 갑자기 행선지를 정한 바람에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 아무튼 테라자와 히로타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왜군의 철군 당시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맞섰던 무리에 속해있었으나 이순신 장군이 시마즈에 집중하는 사이에 도망치는데 성공했다. 작년 크리스마스 때 영화 <노량>을 봤었는데, 그 일본군 무리에 있었겠군. ㅎㅎ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도 중용되어 인근의 토지를 하사받고 가라쓰 영주로써 성을 지었단다. 고구려에서 빠져 나온 비류가 인천에 자리를 잡았다가 땅이 짜서 농사를 짓기 힘들어 결국 한성에 자리 잡은 동생 온조 세력에 흡수되었다는 백제 건국 설화를 생각해 보면 바닷가에 면한 짠 땅을 주는게 아끼는 신하가 맞는건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여하튼 한반도와 직선거리에 있는 항구임을 감안하면 이 지역이 상당한 요충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고, 이런 주요 요충지를 받았으니 도쿠가와에게도 상당한 신임을 받았던 거겠지 싶었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동안 발을 열심히 계단을 한 칸씩 밟아 올라갔다. 가라쓰성은 등나무꽃이 명물인 듯 싶었다. 안내판에 등나무꽃 개화 시기가 쓰여있고, 공간이 있는 곳마다 등나무가 얽힌 벤치가 있었다. 학교 다닐 때 등나무 벤치가 있었는데, 나는 역시 어렸을 때부터 극T였는지 꽃 피면 벌이 많아서 싫어했었다. 그래서 지금 아직 꽃이 피지 않은 시기에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낭만이라고는 1도 없는 메마른 인간 같으니.

 

하지만 천수각 꼭대기에 올라가기도 전에 이미 전망이 훌륭했다. 바다와 마을이 한눈에 보이는 풍경. 좋다~라는 말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마침 바닷바람도 불어왔고. 그러나 여기에 정신이 팔릴 때가 아니다. 너무 이른 아침에 나온 바람에 층층이 껴입고 나온 내피를 정리하고 다시 천수각을 향해 돌진했다. 그래도 내 옷이 너무 두꺼웠는지 지나치는 일본인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이제 날씨와 살짝 어긋난 의상 따위에 눈치 볼 나이는 아닌 관계로 쿨하고 꿋꿋하게 천수각 안으로 들어갔다. 뭐, 이 옷차림이 이상하게 느끼는 건 너지, 나는 괜찮으니까.

 

맙소사- 5층짜리 천수각을 걸어 올라갔다 내려오라고? 이때 잠깐 엘리베이터를 탈 걸 그랬나... 생각했지만 천수각은 대안이 없으므로 열심히 계단을 타기로 하고 입장권을 끊었다. 그런데 2층과 3층은 사진 촬영 금지란다. 응? 2층은 가라쓰성 역사 전시관이고 3층은 가라쓰 도자기 전시관이라며 여기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면 어떻게 하니? 하지만 나는 말 잘 듣는 착한 관람객이니까 눈으로만 담는 수밖에.

 

2층에는 가라쓰성의 역대 영주 가문들 이야기가 쭉 전시되어 있었다. 일본어를 읽고 말할 줄 알아도 이렇게 온 사방에 일본어가 가득하면 읽는데 시간도 오래 걸리고 한글만큼 속도가 쭉쭉 안 나는 것에도 짜증이 나서 집중력이 쉬이 흐트러진다. 그래도 이 공간의 일본어 공격을 맞으며 습득한 것은 1대 성주 가문인 테라자와 가문은 2대 만에 망했다는 사실이었다. 가라쓰성을 지은 테라자와 히로타카는 가라쓰성을 짓고 거치형 대포를 설치하기 위해 방파제를 짓고 간척을 해서 지금의 가라쓰의 해안선을 확정했다고 한다. 해상 요충지를 확실히 다진 셈인데 그의 뒤를 이은 아들은 별 생각 없이 아버지의 정책을 그대로 계승해서 백성들에게 과도하고 조세를 거두어 들였던 모양이다. 이미 오랫동안 과도한 과세를 견딘 백성들이 영주가 바뀌었는데도 상황이 변하지 않는 것을 견디기 어려웠을 테다. 그래서 꽤 큰 규모의 반란이 있었다고 한다. 이 반란에 가톨릭 신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굳이 써 있는 것을 보니 실제로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가 아니면 종교로 시선을 돌리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1대 영주 테라자와 히로타카도 한때는 가톨릭 신자였다고 하는 것을 보니 워낙에 가톨릭 신자들이 많았던 지역인 듯 하니, 의도적이고 계획적으로 중심 역할을 했다기 보다는 반란 지도자들이 가톨릭 신자인 경우가 많았겠지.

여하튼 이 반란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한 것을 이유로 봉토도 많이 압수당하고 (패널의 표현에 의하면) 아버지의 공로를 보아 “겨우” 다이묘의 지위를 유지할 정도 선에서 반란 진압의 실패에 대한 처벌은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몇 년 뒤 이 아들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자결을 했다고. 아무리 해상 요충지라고 해도 임진왜란 이후 막부의 중심지는 저 멀리 도쿄로 옮겨갔고, 한반도와의 관계도 단절되면서 한반도에 가장 가까운 항구라는 가라쓰의 의미와 중요도는 떨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테라자와 가문 이후 가라쓰성은 성주 가문이 무지 많이 바뀌었다. 아무리 일본어 한자를 많이 알아도-많이 아는 것도 아니지만- 성이나 이름을 읽는 건 어려워서 다 기억이 나지는 않고, 왠지 눈과 귀에 익은 마츠다이라 가문 정도만 기억에 남아 있다. 거꾸로 마츠다이라는 왜 이렇게 익숙하지? 하지만 찾아보진 않겠지.

 

그리고 3층. 가라쓰 도자기를 중점적으로 전시하고 있는 공간이었다. 이전에 인근의 아리타에 가서 아리타 도자기를 한껏 보고 체험도 하고 온 적이 있었기 때문에 가라쓰 도자기도 아리타 도자기와 비슷한 느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과는 달랐다. 이렇게 먼저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을 피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완전 딱 떨어지는 비유라고는 자신할 수 없지만 아리타 도자기는 백자 느낌이었고, 가라쓰 도자기는 분청사기 느낌이었다. 흙 자체나 유약에 모래질이 많은 것도 그렇고, 소박하고 수수한데도 매력적인 것도 그렇고. 우리나라에서는 화려한 청자를 선호했던 고려가 말기의 어려움에 처하고 조선으로 넘어가면서 고려와 다른 뽀얀 미학을 자랑했던 백자 사이에 존재했던 분청사기의 위치가 조금 낮게 설정되어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분청사기는 투박하지만 예쁜 매력이 있는데 가라쓰 도자기도 꼭 그런 느낌이었달까. 분청사기가 그러한 것처럼 가라쓰 도자기도 일상에 아무렇게나 써도 나름의 매력과 미학이 뿜어져 나오는 그런 그릇인 느낌이었다. 물론 일본의 도자기 자체가 임진왜란 이후에 정립되고 발전되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도자기 제작의 역사가 짧긴 하다. 가라쓰 도자기도 15세기의 끝무렵에 그 초기 시도가 있었다고 되어 있었다. 본격적인 것은 16세기 중반에서 17세기라고 하고, 가라쓰 도자기만의 특징은 한 사람의 도예가가 시작부터 끝까지 맡아서 제작한다는 것을 꼽고 있었다. 나는 거꾸로 이게 특징인가 싶긴 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대체로 완전 공장에서 찍어내는 그릇이 아니고서야 보통 한 사람의 도예가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책임지고 만들지 않나 싶어서. 도자기의 미학을 찾아내는 눈은 없지만 도자기 보는 것은 좋아하기 때문에 3층 전시가 너무 즐거웠다. 소위 말하는 그릇 쪼가리 마저도 귀여워보이다니- 나도 참 중증이다. 그런데도 이 미학을 공부할 생각은 안 드는 것도 신기하고.

4층은 가라쓰 아이들의 그림이 걸려있었는데, 나는 이미 마음을 5층에 빼앗겨서 크게 눈여겨 보지는 못했다. 4층은 그냥 통과하듯이 지나 5층으로 올라갔다.

 

천수각 최고층은 360도 돌아가면서 봐 주는 것이 인지상정. 바람이 좀 불었지만 바다도 보이고 마을도 보이고, 체육대회 중인 학교 운동장도 보이는 것이 전망이 탁 트여서 어딜 봐도 재미있었다. 등산은 싫어하지만 높은 곳에 올라가 보는 건 또 무지 좋아하는 유형이라 두 바퀴쯤 돌고도 아직 흥이 차오르는 중인 내가 스스로 웃기다. 뱅글뱅글 돌면서 풍경을 실컷 감상하면서 우리나라의 어디쯤이 이런 풍경과 비슷한 전망이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언제부터인지 이런 버릇이 생겼는데, 특히 외국 여행을 갔을 때 우리나라의 어디와 개념적으로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까를 가늠해 보게 된다. 바다도 보이고, 마을도 보이는 풍경이니까... 강릉 경포대 정도가 비슷하려나. 여기만큼 높지는 않지만 바다도 보이고, 경포호도 보이고, 인근의 마을도 보였던 것 같으니.

가라쓰성 천수각에서 보이는 바다와 마을의 풍경들

 

여전히 흥이 나 있는 상태로 천수각을 내려오다보니 바로 앞에 중학교가 하나 있고 아이들이 하교를 하는 시간이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교복 입은 아이들을 많이 보네. 근데 중학생이 오후 4시에 하교하나? 졸업한 지가 너무 오래라 하교 시간도 기억이 안 난다. 귀엽네~라고 생각하면서 길을 재촉하는데 네 다섯 명의 남자 중학생 아가야들이 한 공중전화 부스에 모여있었다. 남자애들이 전화 부스에 올망졸망 모여있으니 시선이 안 갈 수가 없는데- 가만히 보니 공중전화 부스 안에 고양이 한 마리가 식빵을 굽고 있다. 아이고~ 넌 또 왜 이러고 있니, 귀엽게! 요 아가야들 가고 나면 나도 너랑 사진 좀 찍어야겠다!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전화부스를 포위하고 있던 아가야들이 실컷 사진을 찍었는지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보다가 사라졌고 드디어 품위 있게 식빵을 굽고 계신 고양님께 다가갈 기회가 생겼다. 바람이 꽤 불고 있어서 추웠는지 바람을 피하려고 전화 부스 안으로 들어간 것 같았는데, 너 아주 이 동네 대장고양이구나, 풍채가 훤한 것을 보니.

동전 넣는 공중전화 부스 자체도 진짜 오랜만인데, 고양이가 식빵을 굽고 있다니- 이거야말로 만화의 한 장면 아닐지 ㅋㅋ

 

역시나 고양이 집사는 고양이를 보면 힘이 난다. 다시 가라쓰역으로 돌아가려면 또 한 20분을 걸어야 하겠지만 고양이를 만났으니 할 수 있다. 힘을 내서 가라쓰역을 향해서 출발. 가라쓰성 앞에 있는 작은 다리를 건넜는데, 이러니까 진짜 죠카마치를 향해 가는 느낌이 나는 것도 같았다. 성이 워낙 높은 곳에 있으니 건물이 있는 모든 곳이 전부 죠카마치라 새삼스럽고, 다리도 옛 모습을 복원한 것이 아니라서 혼자 내적으로 호들갑을 떤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과한 의미 부여, 과한 감정을 자제하자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구글 맵이를 따라 계획대로 20분을 걸어 가라쓰역으로 돌아와 계획한 시간의 열차를 타는 데에 성공했다. 걸음 수를 확인해보니 15,000보 쯤 걸었다. 아주 뽈뽈거리며 잘도 돌아다녔구만- 돌아오는 열차의 68분이 참 감사한 순간이었다.

가라쓰성에서 가라쓰 시내를 연결하는 죠나이바시(성내교)